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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 KIM

© WOOKIM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패턴1)과 비패턴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패턴은 완벽한 규칙을 갖는 시스템을 말한다. 비패턴은 완벽한 시스템의 규칙을 유추할 수 있거나 또는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외의 것들, 즉 패턴과 비패턴에 속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으나, 현재로선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제외하기로 한다. 패턴은 일종의 정확한 답을 가지는 함수 f(x)라고 말할 수 있다. 동일한 조건을 가졌을 때 이 함수는 동일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함수가 완벽하게 작동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어떠한 사건에 대해 목격하거나 얻는 값들은 이 f(x) 값의 유사 값 또는 비패턴이될 것이다. 그리고 이 유사 값으로 완벽한 함수 f(x)를 유추하거나 기대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늘에는 수많은 비패턴들이있다. '노을 진 하늘', '구름낀 하늘', '뭉게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 '보라 빛 하늘', '별이 빛나는 밤하늘' 등은 모두 하늘로 불리는 것들이다. 하늘의 모습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하늘을 연상시키는 어떤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노을 진', '구름낀', '뭉게 구름이 떠다니는', '보라 빛의', '별이 빛나는'은 어떤이에겐 하늘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늘을 연상시키는 요인들은 수없이 많다. 이들은 서로 닮아있는 부분들이 있지만,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다. 공통점이라면 이들로 부터 하늘이라는 어떤 패턴을 유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서로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는 것 - 우리가 하늘이라 부르는 -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달리 말해 이들은 하늘이라 불리는 무엇의 가능성들, 즉 비패턴들인 것이다.

나는 작업을 통해 다양한 비패턴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는 일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그 무엇과 닮아 있는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만든 비패턴이 그것의 복제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패턴은 그 자체로 매순간 새롭게 만들어지고 생성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2016년에 painted boxes2)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나는 낯선 여행지를 옮겨다니면서 in situ 설치 방식으로 상자 혹은 상자들의 전시를 진행했는데, 이때 상자(들)은 주변 환경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소한 장소에 놓인 상자들은 매번 이전과는 다른 무엇이 되었고, 그 곳 또한 상자(들)로 인해 상자가 놓이기 전과는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비패턴은 도처에 있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 부르는 모든 사물들 혹은 현상들도 무엇의 비패턴들이다. 나무, 바람, 산, 바다, 무지개 ... 그리고 그외 이름이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해보라.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 부르지만, 그 이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중에는 나라는 존재도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닮아 있다. 하지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관계들에 의해서 주로 불리는 이름이 있다는 건 나라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될 뿐이다. 매순간의 나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닮아 있는 그 무엇의 비패턴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의 비패턴들에 대한 완벽한 패턴이 존재할 것이라는 기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는 그것이 발견될지도 모를 시점인 죽음 즉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아마존은 누구인가?(2018)3)와 꽃들에게 희망을(2015)4)은 이러한 고민에 대한 작업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존은 누구인가?는 스스로 자신을 정의 내리지 못하는 아마존이라 불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자신과 타자에 대한 경계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타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행위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가 있다. 그는 타자에 의해 혹은 타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아마존이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순간 그는 사라지게 된다. 그가 정체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애초에 그가 타자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나는 꽃들에게 희망을(2015)을 통해 생과 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늘 생의 시작과 끝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이 최종 목적지라면 생의 순간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작품은 거꾸로 천장에 매달린 여러개의 꽃주머니로 이뤄져있다. 생화로 시작된 꽃들은 조금씩 말라간다. 때때로 꽃잎이 떨어지지만 살포시 망사에 걸쳐 한참을 머문다. 차츰 말라가는 꽃의 끝은 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꽃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말라가지만 이 또한 변화의 일부일 뿐이다. 변화가 끝나는 순간이 죽음을 말하는 걸까? 그렇다면 변화의 끝은 언제일까? 완벽하게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순간성은 오랫동안 나의 관심을 끄는 주제였다. 기대하지 않고 마주친 거대하고 오색찬란한 무지개나 어느 순간 멍하게 바라보게 되는 구름의 모호하면서도 구조적인 형상은 감동을 준다. 창문에 놓은 무지개(2016)는 이런 예기치 못한 환희와 놀라움을 이야기한다. 매일 지나가던 익숙한 길 옆 어느 집 창문에 걸려있는 거대한 꽃 주머니. 행인들이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거대한 꽃주머니를 보고 감탄사를 내뱉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초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목격되어지는 순간들은 수많은 순간들 중 일부이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세계를 향한 관찰자의 위치에서 관찰한 순간들을 표현해 왔다. 그들은 하늘, 구름, 나무, 바람, 건물, 도시, 사람들 그 어떤 것들이 될 수도 있다. 완연히 다른 개체들은 서로 닮아지는 순간이 있다.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던 각각의 개체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나는 이 흐름을 통해 보이지 않던 개체들을 목격한다. 진동하는 페인트 덩어리 시리즈 (2019)는 이렇게 목격되어지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동하는 덩어리들은 시시각각 수없이 다른 형태와 색으로 관찰된다. 그들은 스스로 진동하거나 다른 덩어리들과 충돌함으로써 흐름은 만들어내는데 이 흐름은 찰나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의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 역시 하나의 덩어리로서 다른 덩어리들과 시시각각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것이다. (20190501)

1) 일반적으로 양식 또는 무늬를 뜻하는 개념과 다른 작가에 의해 정의된 개념이다. 비패턴도 동일함.
2) Painted boxes, 김민우, 설치와 퍼포먼스, 27개의 나무상자들, 104cm x 77.5cm x 98cm, 2016
3) Who is AmaJohn?아마존은 누구인가?, 김민우, 설치/회화, 2018
4)꽃들에게 희망을, 김민우, 설치, 드라이 플라워, 망사, 비닐, 3.5m x 3.5m x 4.5m, 2015

- 2019. 5. 1